4.3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제주도는 한반도 남단의 섬이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조건과 자연적 조건과의 투쟁만큼이나 역사적으로도 반도와는 다른 특유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를 갖는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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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특징
하나의 역사적
제주도가 눈 속의 가시처럼 매우 거북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5․10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 병력과 함께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되었다. 미군정은 증강된 병력을 총괄 지휘하기 위해 5월 중순께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미군 20연대장)을 파견, 제주 현지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경비대,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4월 3일 이후로 수년간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충돌이 있었고, 1948년 말에 시작된 소위 ‘초토화작전’에 의해 수많은 양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참극(慘劇)이 벌어졌다.
4·3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4·3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이해한다. 당시 제주도 내의 상황들과 중앙 및 국제 정치의 흐름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 고찰해야 할 것이다. 또한 4·3의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남조선노동당제주도위원회'는 어떤 기능을 담당했는지 살펴봄으로써 4·3 발발의 원인을 추리해 볼
Ⅰ. 머리말
2013년은 제주4·3사건이 일어난 지 65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 탓인지 올해에 제주4·3사건을 소재로 ‘지슬’이라는 독립영화가 3월 21일에 개봉을 했고, 독립영화로는 최고의 선전을 한 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의 사람들에게 내륙과 동떨어진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은 생소하
5명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을 상대로 제주4.3특별법의 위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 청구소송에서 “4.3폭동은 남로당이 북을 기지로 하여 한반도 전체를 적화하려고 소련수상 스탈린의 계획에 따라 우리 국민의 주권적 결단인 5.10총선거를 분쇄, 무산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투행위였습니다. 그런
, 분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즉, 미군정은 광범하고 조밀한 수집망과 체계적인 정리.분석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미군정 자료들이 가진 커다란 장점이다. 그러나 주한미군 또는 미군은 그러한 정보와 자료를 조작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 된다.
제주도는 다시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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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주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본격화된 제주도민중항쟁을 살핌에 있어 소박한 수준이지만 당시의 직업구성을 중심으로 행위주체가 어떻게 조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항
45년말과 1946년 벽두의 찬-반탁운동을 거치면서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의 지경이 되었고, ‘찬탁=친소=공산주의자=매국, 반탁=반소=민족주의자=애국’이라는 뚜렷한 정치적 표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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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정의
‘4.3’이란 제주도에서 5백여 명
45년 8월 조선은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내부의 역량에 따라서는 사회구조적 변혁을 할 수 있는 1차적인 조건이 구비된 셈이었다. 실제로 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역사전환기 또는 사회변혁기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개입이 없이 조선자체의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